한국의 역사 part.3 발해의 건국 과 멸망 특징

발해. 한반도 북부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 및 하바롭스크 변경주에 걸쳐있었습니다. 원래 국가명은 진국이었으나, 713년에 발해로 국호를 변경했습니다. 당나라, 통일신라, 고대 일본과 외교를 수립하고 교통로를 통해 번창한 무역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통적인 예술과 공예를 지원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대표적인 예술 형식인 벽화는 발해 시대에도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발해는 벽화를 통해 역사와 종교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창의력과 기술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중국의 문화와 기술을 수입하고, 통일신라와의 교류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기술을 공유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발해의 문화와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는 독특하고 다채로운 문화적인 특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선왕대에 이르러 요동을 점령하면서 발해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때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926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이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발해의 와 대조영

1. 발해의 건국

.668년에 당은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당은 고구려 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강제로 영주(榮州)로 이주시켰습니다.

696년 5월, 대조영은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만주 동부 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합쳐서 698년에 길림성 돈화현 부근에 위치한 읍루의 동모산 기슭을 점령했고 진국을 세웠습니다. 말갈 촌장과 고구려 촌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진국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국은 고구려 유민들의 협력으로 생겨났으며 대조영이 진국왕이 되면서 고구려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진국은 대동강 이북부부터 길림성 돈화현까지의 지역을 포함하였습니다. 진국은 당나라에 대항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진국은 당나라에 맞선 고구려의 마지막 왕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 발해의 특징

 

1) 발해의 영토확장

발해는 초기에 영토를 크게 넓혀 다양한 원주민과 외국인 집단을 흡수하여 다민족 국가가 되었습니다. 발해의 지배 영역은 한반도 남쪽부터 현재의 일부 만주와 러시아 연해 일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렇게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발해는 지배력을 강화하면서도 지역의 다양성을 고려해 왔습니다.
문왕은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으며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국내 체제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756년에 수도를 이전한 상경은 다양한 세력의 주요 이동 경로이자 물자 교류의 중심지였으며, 농사를 짓기에도 편리한 지역이었습니다. 발해의 수도 이전 이후 농업은 급속히 발전하고 인구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수도를 중심으로 주요 교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 각지를 연결하는 대외 무역에도 더욱 주력했습니다. 또한 신라와는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종래의 대립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돌궐 및 일본 등과도 친선 관계를 맺으며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였습니다. 793년에 문왕이 사망한 이후 대원, 성왕, 강왕, 정왕, 희왕, 간왕이 차례로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지배층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력이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2) 주변국과의 관계

발해는 중국 당나라와 조선 신라와 같은 이웃 국가와 복잡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때로는 당나라와 동맹을 유지하고 때로는 당나라와 싸웠습니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고구려의 후계자인 신라와 싸웠기 때문에 종종 긴장되었습니다.

 

3) 문화유산

발해는 국경 내 다양한 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중국 문화의 측면도 수용하였습니다. 또한, 발해는 공식 비문과 문서에 사용된 ‘발해 문자’ 또는 ‘발해 문자’라고 하는 독특한 문자 체계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발해 문자 체계는 발해의 문화유산 중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4) 쇠퇴와 멸망

선왕 사후 100여 년간의 발해 역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발해 멸망을 기록을 보면, 수도 급습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91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부족을 통일하고 대거란국을 건국했습니다. 이후 발해와 거란은 요동을 두고 10년간 쟁탈전을 벌였으며, 결국 발해가 소모전에서 패했습니다. 요동을 잃은 발해에서는 당시 고구려인과 동맹 관계였던 말갈이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10년 간의 공방전으로 요동을 빼앗겼지만 발해는 924년 5월에 요동을 공격하여 탈환한 후 거란인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925년 4월 요군은 발해의 신주를 먼저 공격하여 요동 방어선으로 군사를 몰리게 만들었고, 이는 12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요는 발해가 요동에 방어선을 다진 것을 틈타서 발해와의 무역로인 거란도를 통해 기습 공격하였으며, 부여부를 3일 만에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발해의 혼란을 이용하여 요의 군대는 수도 홀한성으로 직진하여 함락시켰습니다.

발해와 요의 전쟁은 무려 20여 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요동 지역을 둘러싼 전투는 요의 승리로 일단락되고 발해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면서 경제, 군사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요나라는 20여년간의 전쟁 경험을 통한 발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술을 계획하였다. 즉 요동 방어선을 우회해서 공격해서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발해 유민들의 저항인 발해 부흥운동은 1116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발해의 후예임을 칭하며 건국한 나라는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요나라와 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Leave a Comment